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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 줄거리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공화국 민족보위부 124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가 실패한 1.21 사태, 그리고 주인공 강인찬(설경구 扮)의 깡패 지령 활동 중 상대 조직의 타겟을 공격하며 경찰에게 포획되는 모습이 교차되며 영화가 시작된다. 그렇게 사형을 선고받은 강인찬은 어느 방에서 강인찬의 뒷조사를 읊는 최재헌(안성기 扮)의 회유를 받고서는 또다른 사형수 한상필(정재영 扮)과 함께 형식상의 사형은 그대로 집행된다.
그리고 여타 험악한 인물들과 함께 낯선 선박에 탑승하며 외딴 섬으로 이송되는 장면으로 줄거리는 이어진다. 탑승 인원들은 험악한 어투로 선박 내에서 주먹다짐까지 오가는 분위기였지만, 중사 조돈일(허준호 扮)이 총기 무력을 활용하여 단숨에 죄수들을 제압시킨 뒤 어찌저찌 실미도로 죄수 전원을 집합시키게 된다. 도착한 실미도에선 병영이 펼쳐져 있었고, 죄수 각자들에겐 기간병 하나씩 배정, 완수 후 새로운 삶과 명예를 약속하는 최재헌의 회유에 따라 전원이 군복을 입으며 684부대가 완성된다. 이윽고 죄수들은 전부 훈련병이 되어 혹독한 훈련이 시작된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이들은 단 3개월 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 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남북한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 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김계원으로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구 시대의 유물'이자 '유령부대'가 되어버린 실미도 684부대. 교육대장이 '차라리 월남에라도 파병해달라. 저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공을 세우고도 남는다.'라고 건의했지만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거절당한다. 과연 684부대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영화와 실제사건의 비교
영화는 실미도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고, 실제 사건과는 대략적인 전개는 비슷하지만 각색이 심하게 되어있어서 세부적인 면은 실제 사실과는 많이 어긋나기 때문에 이 점을 유의해서 봐야한다.
비록 영화 트레일러에 '실제 실미도 684부대 사건과는 무관합니다.'라고 대놓고 적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건이 왜곡 수준으로 지나치게 바뀌고 심지어 원작이 되었던 소설 '실미도'의 내용들 마저 상당히 왜곡 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영화 유튜버 거의없다는 천만 관객 영화 부관참시 프로젝트에서 "실미도 사태가 비극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척 하면서 사건들을 왜곡 시켜서라도 관객들을 억지로 울리며 감성팔이 하는 영화."라고 깠다. 특히 영화 감독이 강우석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실미도 사건 유가족들과 생존 기간병들은 영화에서 사실을 완전히 왜곡시켰다면서 치를 떨었고, 지금도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는 지경이다.
- 부대원들의 출신 성분
'범죄자'나 '밑바닥 인생'을 주로 포섭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런 식의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적인 효과를 위한 영화적 장치일 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고증오류다. 실제 북파공작원으로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들도 있었고, 운동선수나 서커스단 단원, 운전기사 등의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원도 있었다고 한다. 백동호가 집필한 원작 소설에서는 가정을 부양하던 성실한 노동부도 있었다. 적지에 침투한 후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부대원들이 버스를 탈취해 서울을 향해 가던 중 버스기사가 도망치자 버스운전 경험이 있던 부대원이 대신 운전하였던 것으로 미루어봐도 임기응변을 위해 여러 방면의 이력이 있는 인원을 소집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이 때문에 부대원을 범죄자 출신으로 묘사하였다고 해서 유족들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물론 진짜 전과자 출신도 존재하긴 했다. 다만 영화에 나온 것처럼 살인 등의 중죄인이나 건달이 아니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손재주가 좋은 소매치기 등이 선호되었다고 한다.
이후 모집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중앙정보부에서는 실제 전국 교도소에서 무기수, 사형수 차출을 고려했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수감자들은 나중에 죽으면 반드시 시신을 유족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하기 어려운 북파 임무에 보낼 수 없다고 극력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영화와 같은 인력 선발은 오히려 당시 비슷한 목적으로 편성된 다른 부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1사태 이후 창설된 보복부대(공군 산하 실미도 부대, 해군 산하 장봉도 부대, 육군 산하 선갑도 부대) 중에서 육군 선갑도 부대는 실제로 안양교도소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부대원들을 구성했다. 이들은 김일성 사살 계획이 유야무야되었다고 살해당하는 일은 없었고, 해체 이후 부대원들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졸지에 생겨버린 '대한민국 공군이 형벌부대 운영한다'란 착각은 지워지기 힘들어졌다.
- 부대원 선발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이 직접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대원들을 스카웃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공군 모병관이 신체능력이 우수한 자원을 물색하여 입대를 설득, 유도했다. 이들은 공군 소속임을 드러내지 않고 중앙정보부 패찰을 들고 다니며 중정 요원으로 행세했다. 당시에는 중앙정보부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이래야 협조를 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 입대 사유
영화에서는 재소자나 사형수를 주로 소집하였기 때문에 사면(赦免)을 목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 부대원들은 재소자가 아니었으므로 입대사유 또한 제각각이었다. 무엇보다 모병관들은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했다고 한다. 일단 매달 거액의 봉급을 주고 장교 후보생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임무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살 집과 거액의 성공보수를 지급하며, 원할 경우 장교로 임관하거나 미군 부대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했다. 부대원들은 이러한 혜택과 남자로써의 공명심(功名心) 등에 끌려 입대한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대장 외 2명의 중사 교관
교관은 공군 자체의 특수전 이수자로 미국령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특수정보수집 및 정글전 훈련까지 이수한 정보 특기자들이었다. 실제 계급은 부사관이었지만 실미도에 부임할 때는 공군 소위계급으로 임관 하였으며 작전이 성공할 경우 정식 임관할 예정이었다.
- 사용 장비
영화에서는 AK-47 소총 등을 사용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M1 카빈, M3 기관단총, PPS-43 기관단총 등을 사용하였으며 1일 500발의 실탄 사격을 하였다. 후에 뉴스에서 실미도 영화에서 사용된 AK47은 소품이 아닌 진짜 총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장구류 역시 AK 소총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M1 카빈용 탄입대를 차고 있는 오류가 있다.
- 훈련 도중 인원 손실
영화에서는 외줄타기 훈련 도중 1명이 사망, 그리고 1명이 부상당하여 급양병으로 보직 변경하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 외줄다리 훈련 중 사고를 당한 2명은 모두 부상만 당했으며, 작업병 등으로 부대에 남았다. 수영훈련 중 1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유일한 훈련 중 사망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은 수영을 잘 하던 인원이었고 더욱 미스테리한 건 폐에 물이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역시 실질적인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이었다고 한다. 당시 부대원들은 완전군장을 하고 수영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중 1명이 너무 힘에 겨워 꺼내달라고 애원했지만 교관들은 이를 외면했다고 한다. 결국 이 부대원은 탈진해 익사하고 말았다.
- 즉결처형자의 수
영화와 비슷한 방식의 즉결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인원 수와 처형 내용 등은 차이가 있다.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익사 1명, 즉결처형 6명으로 알려저 있으나, 국방부 공식 문서에는 익사 2명, 도주 중 체포돼 즉결처분 2명, 자살 3명이라고 기록돼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도주 중 체포된 부대원 2명은, 부대 창설 후 2개월여 뒤에 실미도 옆 무의도로 사역을 나갔다가 복귀하지 않고 민가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끌려왔으며, 명령에 의해 다른 부대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죽고 만다.
- 출동
영화에서는 (사망, 부상당한 인원을 제외한)부대원 전체가 배를 타고 침투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작전 중지 명령을 하달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부대원 중 최정예 9명을 선발하여 비행정을 이용해 침투할 계획이었고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진 건 출발 직전이었다.
- 작전 취소 이유
영화에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과 중앙정보부장의 교체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언급하지만, 미국의 인가 없는 작전 실행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 교관과의 관계
영화상에는 2명의 교관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오지만, 실제로는 자원해서 남기로 한 김방일 소대장 외에 특수전 교육을 받은 교관은 모두 전출되고 부대 성격과 무관한 일반 하사관들이 부임하였다. 즉, 영화상의 기간병들과 훈련병들의 관계는 모두 영화적 상상에 의한 허구다. 섬 안에 숨어 생존한 기간병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시 훈련병들이 섬을 철저히 수색했다면 충분히 섬 안에 숨은 기간병 전부를 사살할 수 있었으나 훈련병들과 기간병 사이엔 개인적 감정이 없었기에 일부러 섬을 수색하지 않고 실미도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 조 중사의 육지 방문
영화에서는 부대 해체를 중지해달라는 청원을 이유로 공군본부에 출장을 간 걸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조 중사의 모델이 된 김방일 소대장은 인천으로 부상당한 어민의 문병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약혼자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 늦게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김방일 소대장이 뭍에 나가있는 날을 골라서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김방일 소대장이 부대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고 존경받았었음을 보여준다.
- 교육대장의 인성과 사망 경위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이 성실하고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고, 의연하게 권총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각종 비리를 저지르던 악질 군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요즘 가치로 따지면 월 1억원 정도의 부대 운영비(월급, 식비 등)가 배정되었는데, 부대원에게 지급되어야할 월급은 단 3개월만 소액 지급되고 중지되었으며, 식사도 고기반찬은 커녕 매우 형편없었다. 교육대장은 이중장부를 만들어 제대로 운영비가 쓰인 것처럼 위장하고, 실제로는 본인이 거액을 착복했다. 이로 인해 기간병 및 훈련병들에게 상당한 원성을 샀다. 그래서 앙심을 품은 훈련병 2명이 망치로 머리를 가격해 살해했다. 극적 연출을 위해 자살이라는 묘사를 한 것이겠지만, 현역 군인에게는 자살도 심각한 불명예이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영화사를 고소하기도 했다. 단 작전이 취소되고 부대가 방치될 당시에 훈련병들을 임관시키는 것이 어떻냐고 상부에 건의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를 보면 최소한의 인간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 버스 탈취 후 행적
영화에서는 버스 탈취 후 바리케이드를 세운 진압군과 한차례 교전 후 서울로 향하지만 당시 실제 684부대원이 탈취한 버스에 타고 있었던 고 우문국 화백의 증언(기사)에 따르면 버스 탈취 후 석바위에서 버스가 펑크나자 뒤에 오는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탑승하였으며, 탑승하자마자 진압군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후 차내에서도 어디로 향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을 내보내고 자폭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다 같이 자폭했다. 때문에 출근하던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동행하고 말았다. 또한 영화와 달리 당시 탈취한 버스를 운전하던 버스 기사도 생존했으며, 훗날 증언으로는 군경의 눈에 띄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을 경인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가고 자잘한 법규위반을 하는 등 경찰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했지만 인천을 벗어나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검문은 커녕 군경과 조우도 못했다고 한다.
- 버스 자폭 이후의 부대원 근황
영화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실제로는 6명이 살아있었다. 6명 모두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그 중 상태가 심각했던 2명은 후송 도중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4명이 살아남았고, 그 4명도 결국 군사재판에서 1, 2심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시신마저 불법 암매장으로 처리되어, 현재까지도 그들이 어디 묻혔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 부대원 2명 탈출 후 강간
실제 사건 당시 탈출한 인원은 생존자 증언으로는 3명, 국방부 공식 문건에는 4명이었다. 실제 피해자는 보건 교사가 아니라 마을 처녀 2명이었다. 2명은 각각 당시 20세, 17세의 자매였으며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영화에선 안 나오지만, 시나리오상 이 사건 이후 부대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기밀 엄수 지시를 내린 뒤 육지 집창촌에 순번제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대원 몇몇이 자신을 상대한 창녀에게 쪽지를 건네거나 몸에 글자를 쓰는 식으로 가족 등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전하려 했으나, 대원들이 나간 뒤 공군 헌병들이 들어와 이것들을 전부 압수하고 지워버렸다.
- 부대 상징물의 위치
인골(人骨)로 장식한 '우리의 신조'는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의 사무실 벽에 있지만 실제로는 체력단련장 옆에 있었다. 유골은 담력훈련 및 성병 치료용 민간요법을 위해 인천의 중국인 무덤을 파헤쳐 확보한 것이며, 나머지 유골은 갈아서 민간요법으로 나눠먹었다고 한다.
관람후기
실제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하여 만들어진 실미도는 우리 역사의 단면이기도하다. 지금은 교과서나 아니면 인터넷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뉴스만으로 확인이 가능하였고 근처에 살고있는 지역 주민들만 알고있었다.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를 보고싶다면 백동호님의 소설 <실미도>를 보면된다. 역사의 이야기이기에 천만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지만 역사를 영화로 만들어진걸 관람한다는건 참으로 힘든일인듯하다.